‘와타나베 미키’를 통해 본 日 ․ 일본인
일본에서 일고 있는 혐한(嫌恨 ․ 미워하고 원망함) 증이 日만의 문제를 넘어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까지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본 내 한류열풍이 식는 대신 중국 젊은이들에게 깊숙이 파고들며 K - POP과 치․맥으로 대표되는 유커(游客)들의 한국방문이 탑 기사로 장식되기도 한다.
‘독도’는 ‘다케시마’라며 일본 시마네현이 2005년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해 정부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를 거행하면서 일본 우익과 정치인들의 막말과 혐한시위, 도(度)를 넘는 역사적 진실 왜곡과 교과서 문제, 위안부 할머니 배상 문제 등은 국민감정을 악화시킬 대로 악화되게 하고 있어 한일 간에는 끝낼 내야 끝낼 수 없는 국민적 감정과 정서가 가슴 언저리를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에 ‘가깝고도 먼 나라’ 란 표현이 양국의 현 주소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매월 주기적으로 광화문 옛 조선시대 육조거리(광화문 - 충무공 동상 주변)에서 경복궁 일원까지 자원봉사 해설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타오르는 분노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4대 궁궐의 하나인 경복궁, 특히 건천궁(乾淸宮) 해설을 하다 보면 가슴속에 치미는 울컥함과 서러움, 참담한 심회를 제어하기 어려워 질 때이다.
1591년 3월 왜(倭 ․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전국을 통일하고 중국을 치기 위해 조선에 통신사를 보낸다. ‘명(明)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을 내어 달라’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 조선 조정에서 볼 때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단호한 거절이 이어질 밖에.
결국 일본은 1592년 4월14일 700여 척의 함선으로 부산포에 닻을 내리고 침략을 단행, 5월3일 동대문을 통해 한양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한다. 한양에 입성, 경복궁을 처음 본 ‘가토기요마사’ 부대의 종군승 제다쿠는 “이곳이 용의 세계인지 신선의 세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하며 경복궁의 장엄함을 <조선일기>에서 묘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4일 뒤 경복궁은 없어지고 만다. 선조가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蒙塵)길에 오른 것을 본 성난 군중이 불을 놓은 것이다. 경복궁은 완전 잿더미로 폐허화되고 만다.
그렇게 중국의 자금성보다 일찍 건축되었던 조선 건축의 백미, 조선 최대의 궁궐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26대 고종 임금 때 흥선 대원군에 의해 1865년 중건될 때까지 273년 동안 조선 제1 궁궐이자 법궁인 경복궁은 역사에서 빈 순간이었다. 이 또한 일본에 의한 임진왜란이 원죄(原罪)였던 것이다. 그 후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흥선 대원군은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 국왕과 왕비의 거처로 이용하고 외교관의 접견 장소로 이용하고자 ‘건천궁’을 지었다.
하지만 건천궁은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면서 한국 근세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당시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하고, 1909년 건청궁도 헐렸다. 식민통치와 우리 궁궐의 위엄을 무너트리기 위해 근정전 앞마당에 조선총독부(후일 중앙청) 건물을 세웠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동물원화 해 우리 궁궐과 조선의 정신을 희화화 시키기도 했다. 그게 바로 일제 강점 36년 동안 조선을 말살하고자 했던 일본이고 일본인들이었다.
왜구들의 발호(跋扈)와 이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는 고래(古來)로부터 상상을 초월해 왔으며,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 이후 한-일 간 국민적 감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전 분야에 이르기까지 극한 대치와 더불어 좋을리 만무하다.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양재동에서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주최의 ‘한반도 통일 경제포럼’이 열렸다. 거기서 한 일본인을 만났다. 토론이 밤늦게 까지 이어진 관계로 별도의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 필자 스스로 내재돼 왔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혐일(嫌日)의 사고가 조금은 완화되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지난 5월20일 ‘제9회 세계인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을 수상한 와타나베 미키 유한대 교수였다. 와타나베 미키 교수는 한국에서 결혼이민자 자립지원을 위한 꿈드림학교를 만들고, 11개 이민자 관련 단체를 모아 만든 ‘글로벌커뮤니티협회’의 회장으로써 활동하며 이민자 자립과 한국 사회 적응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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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포럼에도 참석한 미키 교수는 소개를 받고 한 인사와 수상 소감을 통해 일본인 특유의 상냥함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사랑을 표했다. 올해 나이 56세인 그녀는 금년이 일본에서 산 28년과 한국에 정착한 지 꼭 28년이 되는 중심축에 서 있는 해라며 일본이 한국에 끼친 숱한 일에 대해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심정을 토로한 뒤 자신은 비록 부족하지만 한반도 통일과정에 있어 할 일이 있다면 힘을 보태고 싶다고 밝은 표정을 담아 얘기했다.
그 날 미키 교수가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조선의 마지막 황비 ‘명성황후’와 관련한 마음가짐이었다. 대학 교수로서, 이민자 관련 단체 협회장으로서의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한-일 문화교류에 힘쓰면서 지난해 국회의사당에서 명성황후 1인극을 했을 정도로 선조인 일본인에 의해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난자(亂刺) 당하며 시해된 황후에 대한 죄스러움과 지극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미키 교수의 부친은 일제시대 함경북도 나진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런 인연이었는지 몰라도 그녀는 중학시절 취미로 시작한 연극 활동에 참여하면서 일본 연극의 주역들 가운데 상당수가 재일조선인 2세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다고 한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한국에 정착하기에 이르렀고 지금도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국을 일본에 알리는데 앞장서며, 혐한과 같은 비이성적 행동을 배제하고 문화의 가교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한다. 또 올 가을 명성황후 1인극을 다시 무대에 올릴 것이라고 하니 이 정도면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모든 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내재된 게 한-일 관계지만 그럼에도 지금 우리사회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방송에 나와 천방지축 톡톡 튀는 발언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송인 사유리 씨를 비롯해 독도문제의 전문가로 국제사회에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적극적으로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는 귀화 한국인인 호사카 유지 교수를 생각하면서 새삼 ‘멀고도 가까운 나라’ 양국, 그러나 언젠가는 가장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한국과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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