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10) 프랑스군 원주지구 전투전적비
강릉원주대학교의 드넓게 펼쳐진 축구장 뒷편에는 수풀이 우거진 작은 산이 하나 있다. 그 산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보면,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비석 한 개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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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의 정체는 바로 1951년 1월 벌어진 제2차 원주 전투, 그 중에서도 247고지 전투와 해당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군 대대와 미국 제2사단을 기리는 프랑스군 원주지구 전투전적비다.
이 비석이 기념하는 247고지 전투는 원주 전투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247 고지는 원주 시가지를 감제(瞰制, 적보다 높은 위치에서 관측과 시계의 이점을 지님) 할 수 있었기에 매우 중요했고, 따라서 유엔군 사령부는 미군 제23 보병대대, 휘하 프랑스군 대대, 그리고 제38 보병대대로 하여금 247 고지를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이는 1950년 연말 한국에 도착한 프랑스군 대대가 공식적으로 치른 첫 번째 실전이었다. 직후 대대는 1월 9일 명령에 따라 247고지로 진격하였으나, 북한군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대략 7,000명으로 이루어진 북한군 6개 대대가 강력한 반격을 가했고,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1월의 강원도는 몹시 추웠고, 위기마다 매번 나타나 유엔군을 구했던 항공 지원도 처음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투 도중 프랑스군 대대의 탄약이 모두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이 때, 프랑스군 대대는 묘책을 생각해냈는데, 바로 총검을 이용해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이 판단은 무모했는데, 기관총의 발달과 개인화기의 자동화로 1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 전장에서 역할을 잃어버리고 “통조림 따개” 정도로 취급되는 것이 당시 총검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를 지속할 탄약이 바닥난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평원과 숲에서의 장거리 전투가 주가 되었던 유럽과 반대로 근거리 전투가 반드시 동반되었던 한국전쟁의 고지전 특성상, 프랑스군은 이번만큼은 총검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해당 판단은 적중했다. 프랑스군 대대는 이후 몰려오는 북한군을 상대로 총검 돌격을 실시, 북한군의 공격을 수 차례에 걸쳐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대대 휘하 한국군 2명을 포함해 도합 15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프랑스군은 중요 거점을 성공적으로 사수했다. 이후 1월 11일 유엔군의 항공 지원이 실시되었고, 이에 호응해 12일 유엔군이 247고지를 점령하면서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이 총검 돌격이 어찌나 인상 깊었는지,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앞으로 모든 부대는 총검이 통조림을 따는 데에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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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의 총검 돌격은 한국 전쟁에서 꾸준히 등장했다. 당장 원주 전투 이후 한 달 뒤 벌어진 양평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또다시 총검 돌격을 실시, 25명으로 중공군 한 개 대대를 격퇴했으며, 그보다 앞선 1월 25일에는 튀르키예군이 용인 151고지 전투에서 총검 돌격을 가해 무려 30분만에 중국군 474명을 패퇴시켰다.
프랑스군의 총검 돌격은 단순히 고지 하나를 탈환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247고지 전투에서 벌어졌던 총검 돌격은 “총검은 시대착오적인 무기”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발상의 전환이자, 프랑스군이 보여준 용맹함과 투지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어제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오늘은 가능해지고, 세계 정세의 변화로 예기치 못한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검 돌격에서 프랑스군이 보여주었던 “발상의 전환”, 그리고 “용맹과 투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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