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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칼럼] 9.28 서울 수복의 의미

Written by. 이영석   입력 : 2025-09-18 오후 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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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28일이면 6·25전쟁으로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을 우리 국군과 UN군이 수복한지 75주년이 된다. 중공과 구(舊)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이 합심하여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울 수복은 6·25전쟁과 연결됨은 물론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를 개관(槪觀)한 후 서울 수복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6·25전쟁과 낙동강 방어선

6·25 전쟁 당시 우리 대한민국은 정치적 불안정과 함께 군사대비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이 남침한 지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한 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자유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접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급히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6월 27일 미군과 UN군을 지원하겠다는 결의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UN 안보리는 국제평화와 한반도 안전을 위해 한국에 군사원조 제공을 결정하였고, 7월 7일 UN군을 창설하여 22개국이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미국 등을 포함해 16개국이 전투병을 파병했으며, 인도 등 6개 국가는 의료지원을, 40여 개 나라는 물자를 지원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6·25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서 북한군의 공격을 국군과 UN군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전투이다. 낙동강 방어선의 최고의 격전지는 왜관과 다부동으로 우리나라의 임시수도가 있었던 대구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북한군이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이들은 8월과 9월 두 차례의 총공세를 감행하면서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으나 우리 국군과 UN군의 효율적인 방어 작전과 융단폭격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만약 낙동강 방어선에서 우리 국군과 UN군이 북한군을 방어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UN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꾼 군사작전이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로 보안 유지를 위해 크롬 광석에서 따서 지었다고 한다. 당시 UN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지상으로 반격 작전을 할 경우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을 예상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맥아더의 참모는 물론 미 합참 측 해군들 대부분이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하고, 당시 트루먼 대통령도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반대한 이유는 상륙에 필요한 수많은 함정과 7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인데다 인천의 좁은 수로와 함께 북한군이 바다에 기뢰를 설치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천의 큰 조수간만의 차로 밀물이 들어와 있는 2시간 안에 상륙해야 하고, 북한군의 저항이 극심할 경우 갯벌에 전선(戰船)이 빠지면 바다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조건으로 인해 관계자들 대부분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경우 서울과 근거리인 관계로 서울을 조기에 탈환할 수 있으며, 심리적으로 북한에는 충격을 주고, 국군과 UN군에게는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된 북한이 철도와 도로 등이 서울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기에 북한군의 무기 등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작전적 목표가 있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전쟁의 판세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군과 UN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통일을 이루는 듯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지금의 휴전선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수복의 의미

서울 수복 작전은 미 해병 1사단과 이에 배속된 우리 해병 1연대가 주공으로 인천을 확보한 후 계속 공격하였다. 이들 외에 미 육군 7사단과 우리 육군 17연대는 수원 비행장 확보, 적 퇴로 차단 및 북상하는 미 8군과 연결작전을 수행했다. 이에 북한군은 기존의 수도권 병력으로 방어선을 강화하고 남쪽으로 이동 중이던 일부 부대까지 서울지역으로 복귀시키는 등 서울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 군과 미군의 효율적인 연합작전으로 적 진지와 건물 내에 저항하는 적을 소탕하면서 작전을 진행했다. 결국 우리 해병대 박정모 소위 등 3명이 중앙청으로 진입, 9월 27일 새벽 06:10분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9월 28일 서울에서의 북한군 저항이 끝나 그들이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함으로써 서울을 탈환한 것이다. 이어서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장군, 한국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참가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의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을 뺏긴 지 93일 만이었다. 서울 수복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전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은 전사자, 부상자 및 실종자가 621,479명, UN군은 154,881명, 민간인은 990,968명이었다. 그리고 산업시설 등을 포함하여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주의체제와 러·중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체제가 충돌하고 있어 6·25전쟁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셋째, 민관군의 국민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론분열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국제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넷째,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군의 창끝 전투력의 핵심인 초급 간부들의 전역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보도에 걱정이 앞선다. 이들을 위한 획기적인 정책 대안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konas)

이영석 : 한국의병연구소장, 재향군인회 안보교수, 안보전략연구원 및 논문심사위원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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