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유린(蹂躪)의 환란(患亂)
청국과 일본이 서로 패권을 노려 1894-95년 한국 땅에서 일으킨 전쟁인데, 한국의 동학란(東學亂)에 청국이 출병한데 대하여 1885년의 천진조약을 방패삼아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라는 구실 아래 일본도 출병하여 양군이 한반도 안에서 대치하다 1894년 6월 풍도(楓島) 앞바다와 아산서 충돌, 그 해 8월에 개전하였는데, 일본군의 연승으로 청국이 굴복하고 이듬해 4월에 일본 ‘시모노세끼’(下關)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청국은 일본에게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澎湖島)를 할양하고 ‘고평은‘(高平銀) 2억 량을 지불했다.
이후 일본은 급속도로 국력이 충실해져 한국에 대해 그 세력이 확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청국은 종래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여 왔으며 한국 정부도 청국에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어 온 터라 양국에 대하여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그리하여 고종 19년(1882)의 임오군란(壬午軍亂), 고종 21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분규에 양국은 항상 관여하여 알력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종 31년(1894)6월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한국 조정에서는 청국에 원군을 청하여 3천명의 청병이 들어오자 일본은 항의하여 자국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대를 증원하려 하자 한국 정부는 동학란이 진정되고 있으니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은 거부하고 대청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근대와 현대를 살다 간 일본의 저명한 근대역사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약간의 중립적 입장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청전쟁이란 무엇이던가? 일청전쟁은 천황제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한 최초의 식민지 획득 전쟁이다.”라는 정의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이 나라의 소위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시민권을 가지고 통용되었다. 혹은 “조선과 중국에 대하여 장기간 준비된 천황제 국가의 침략정책의 결말이다.”라는 의견도 있다.
도대체 일청전쟁의 원인은 어디더냐. 그 원인은 조선(한국)에 있다. 하지만 한국이나 한국인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다면 조선반도라는 지리적 존재에 있다. 원래 반도국가라는 것은 유지가 매우 어렵다. 그런 점은 유럽에 있어서는 발칸반도나 아시아에서의 베트남(安南) 등이 그걸 증명하고 있어 일청전쟁 직전 베트남에서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청국이 베트남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이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프랑스와의 분쟁이다. 청불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청국 복건함대를 전멸시키고, 육지전에서도 청국은 연전연패 했다.1885년이었다.
한반도의 경우는 베트남보다도 더 복잡하다.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베트남과 같지만, 이에 대하여 보호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러시아제국은 이미 시베리아를 그의 손아귀에 넣고 연해주, 만주를 그 제압 하에 두려 하고 있는데다가 그 여세를 몰아 조선반도까지 쥐려는 기세로 나오고 있다.
일본은 절실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다른 강국에 빼앗기는 경우 본토 방위가 문제되는 것으로 보았다.
러일전쟁도 마찬가지. 조선조 말 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청일전쟁 후 청국에서 이권을 얻으려는 국제적인 대립이 격화되자, 러시아는 재빨리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 대련. 여순의 조차권(租借權) 등을 획득하려고 맹렬한 활동을 벌였다. 일본정부는 러시아에 대하여 협상안을 제시했다. 물론 대러시아 전쟁을 결의한 다음이었다.
“청국과 한국의 양 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존중한다.러시아는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세한 이익을 승인 할 것. 그 대신 일본은 러시아의 철도경영의 특수 이익을 승인한다.“ 는 내용, 즉 일본은 한국에 권익을 갖고 러시아는 만주에서 권익을 가져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근본적으로 한국을 종주국으로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뜻에서 결판을 재촉하자 러시아 군 측은, 이 문제는 본국정부에서는 해결하지 않고 극동의 외교관계는 모두 여순에 있는 극동군 총독 ‘알렉세프’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다 해서 동경서 회합했으나 러시아 측이 일본 측 안을 무시하고 북위 39도 이북의 중립지대 안을 내놨다. 이에 일본은 당혹했다. 이미 만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데다 한반도 북반부를 차지하겠다는 야욕이 드러난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배짱을 내밀고 전쟁준비로 치달았다.
이후 양국의 병마와 긴급 전쟁물자의 수송 등 남의 집 앞마당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특히 서해 아산과 풍도, 인천 지방은 타국의 분란이 아닌 자국의 환란인 듯 설왕설래 우왕좌왕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노일전쟁 때는 인천항은 제물포(濟物浦) 시대라 간만의 차가 심해 지금 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갯가의 규모는 광대해서 선박이 정박하기는 오히려 충분했다. 일본 순양함 1척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외에 러시아 군함 2척,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외에 외국선박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인천항은 당시 중립국 항으로 되어 있어 많은 선박이 정박하고 있었다.
어쨌든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기습해 대세를 만회하더니 이듬해 3월 봉천회전 이후 러시아가 다시 기세를 올리자 5월 7일 러시아의 ‘발틱함대’ 전멸로 일본이 전세를 되찾았으나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일본도 전력이 떨어져 어려울 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알선으로 8월 10일‘포스마스’강화조약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말 되었다.(konas) 출처: ‘광복군’ 9호
정 행 룡 (자유기고가)
참고자료
* 국사대사전
* 시바료타로의 ‘고개 위의 구름’









![[안보칼럼] 북한의 드론 전력 위협에 대비한 민·관·군 입체적 대응 방안](/img_data/article/260923/260923_6300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