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140년만의 귀향
본 내용은 국방일보 11.26일자 16면 '오피니언' 난 에 게재되었음(편집자 주)
우리에게 북만주 혹은 간도로 더 익숙한 중국 동베이(東北)를 중심으로 중국에는 약 200만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물론 이들은 중국 국적의 중국인이다. 더욱이 중국 자체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고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민족을 모두 소수민족이라 부르니 중국 내에서는 별반 이상할 것도 없는 국민 중 한 종족일 따름이다. 그러나 여타 민족이 원래 그 자리에서 복속을 통해 중국민이 된 것과는 다르게 조선족은 이주민으로서 하나의 거대 민족군을 이루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족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간도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간도는 원래 남의 땅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이 살아왔던 지역이기에 더 더욱 그러하다. 강희제의 봉금정책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널 수 없었던 시기에도 백두산을 통한 유입은 어렵지 않았고, 수렵과 채집이 삶의 방편이었던 함경도 민초들은 그냥 그곳이 텃밭처럼 익숙한 곳이었다. 굳이 꼬집어 지금의 조선족이 형성한 시기를 말하자면 봉금령이 해제된 1860년대에서 1880년대로 말할 수 있겠고, 특히 1869년 기사대흉(己巳大凶) 때 대규모로 이전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이다.
조선족의 삶은 새 땅을 개척해도 곤고(困苦)했다. 대황무지만 존재하는 광활한 북만의 벌판이 비워져 있음을 보고 미래를 꿈꾸기도 했지만 역사는 나라 없는 국민에게 냉혹했고 고아처럼 서러운 곳이 북간도였다. 하기에 조선족은 더 뭉쳤고 더 악착같이 새 땅을 일궜다. 놀랍게도 동북에 펼쳐진 그 엄청난 수전(水田·논)은 거의 조선인 손에 의해 대를 이어 일군 옥답이다. 그 때문에 항일투사들은 왜놈을 쳐부수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북간도를 택했고 선주(先駐)한 조선인들은 기꺼이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조선족들은 왜놈에게는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기골을 자랑했다. 1931년 7월, 길림성 장춘현(현재 장춘시)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충돌해 145명이 죽고 546명이 다치는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만보산 사건’이다. 물론 왜놈들의 이간질이 원인이었지만 그만큼 이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나 북간도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았던 조선인들이었다. 우리가 원세개 등의 만행으로 중국에 대한 지독한 반중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조선족의 자부심이나 민족 순혈주의로서의 자세는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일전, 목단강 비행장에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렸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기약도 없이 발이 묶였다. 목단강 비행장에는 변변한 식당도 없다. 그런데 식수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지만 이틀을 기약없이 기다리던 그들(대부분이 조선족) 중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였을까? 그것은 140여 년 만의 귀향이었기 때문이었다.(konas)
김종해 (사)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한중 우의공원 관장 gkjh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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