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인 안중근, 그의 삶과 꿈
묘비도 비석도 없는 서울 효창공원의 주인없는 허묘를 아십니까?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安重根·1879∼1910) 장군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이듬해 3월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언 1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안중근 장군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역사 앞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32세의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순국한 안중근 장군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조국애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구현을 위해 역동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교육자로, 사상가로, 그리고 의병장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적 과제 앞에 흔연히 온몸을 던진 민족정기의 화신이었다.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일제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행적을 양분하면 저항과 투쟁의 삶을 살아간 인물, 순응과 민족사에 반한 길을 선택한 인물로 평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안 장군과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사상을 일견할 때 전자에 속함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안 장군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이토를 처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주의자였으며, 근대적 사고를 지닌 민족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도 안중근을 세계적 안광을 지닌 평화의 대표자를 자임한 사상가로 평가한다고 했다.
안 장군은 약육강식 풍진시대를 통찰하고 자주적인 대한독립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동양평화, 나아가 인류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구상하고 그 결과를 ‘동양평화론’이라는 이론으로 표출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구상은 그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삼애정신인 애천·애인·애국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19세기 제국시대에 대처한 논리였다. ‘동양평화론’은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기술하려고 했으나 사형이 빨리 집행됨에 따라 서문과 전감 일부만 집필하고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최근에 와 안 장군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애국지사로 추앙받게 되면서 안 장군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동양평화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사회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가고 있다.
일본·중국·러시아 등 국내외에서 안 의사에 대한 숭모사업과 연구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안 장군의 독립투쟁을 소재로 한 심포지엄과 영화·연극·뮤지컬·오페라 공연 등이 성황을 이루고, 학계에선 안 장군의 사상을 연구하는 논문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이 맨 처음 한 일은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이국땅에서 순국한 독립투사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일이었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모셔오고 곧이어 안중근 장군의 유해까지 찾을 생각으로 효창공원에 ‘사의사 묘역’을 만들었지만 지금까지도 안중근 장군의 묘는 묘비도 비석도 없이 허묘로 남아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끝내 독립된 조국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장군! 선생의 유해를 찾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오랜 세월 주인을 기다리며 비어 있는 허묘에 들러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는 건 어떨까?
송길화 (한국교육연구원장)
본 내용은 국방일보 27일자 16면 '오피니언'란에 게재된 글임.(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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