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기념 시설물 소개」(26) 가평 한국전쟁 미군참전기념비
1951년 5월 26일, 미군 포병부대원 600명과 중공군 4,000명이 이 날 밤새도록 싸웠다. 결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격전은 다음날 해가 뜨면서 수그러들었다. 중공군 전사자 350명, 생포된 중공군 830명, 미군 213포대는 전사자 0명, 부상자 3∼4명. 숱하게 포를 쏘고 총격전에 맨몸으로 맞붙는 백병전까지 치렀음에도 믿을 수 없이 미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름하여 ‘기적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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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카이저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 전투와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커다란 성조기 모양의 비석이 인상적이다. 길 이름도 이색적이다. ‘카이저길’. 이 길 이름은 미군 2사단 제213포병대대의 가평전투, 72탱크부대의 전투지원과 미군 40사단이 가평에 주둔할 때 40사단의 첫 전사자인 Kaiser(카이저) 일병의 이름을 딴 카이저고등학교(현 가평고등학교)를 세운 일화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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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참전비는 성조기 모양의 주탑, 미 제2사단과 미 제40사단의 표지석, 제213야전포병대대 장병의 동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평군은 이 부대들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미 제2사단 72탱크대대는 1951년 4월 중공군의 1차 준계공세 때 궤멸 직전의 국군 제6사단과 영연방군의 철수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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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제40사단은 지금의 가평고등학교를 건립했다. 6·25전쟁 당시 가평에 주둔하던 미 40사단장 조셉 클리랜드(Joseph Cleland) 장군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터에 한국 아이들이 천막교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부대에 돌아가 장병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1만 5000여 명의 미 40사단 장병들은 흔쾌히 2달러씩 돈을 내 학교 건립모금에 나섰다.
1953년 학교 건립 이후에도 가평고와 미 40사단의 인연은 계속돼 매년 미 40사단 출신 참전용사가 가평고 졸업식에 참석해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압록강까지 북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를 거듭하면서 수도권과 서울을 지켜내기 위한 혈전이 벌어졌다. 당시 경기도 가평지역은 그야말로 요충지였다. 가평을 빼앗기면 바로 서울로 적군이 진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평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그 후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한국전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한국을 몰랐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현대의 젊은 세대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그저 “아, 그 시대에는 그랬나보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한번만 더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진심으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된다. 결국 그들의 희생이 거름이 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를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면서 참전용사들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일 때 함께 손잡고 공감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후손인 우리의 역할이다.
가평의 한국전쟁 미군참전비 왼편 바위에 영어로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이것은 70여년 전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의 메아리다.(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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