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생각하면
1941년 12월 8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수는 해마다 줄어들어 지금은 몇 남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일제하의 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였는데 카지와라라는 비교적 젊은 선생이 그 시간의 담당교사였습니다.
학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이 쪽지 한 장을 들고 교실로 들어와서 교사 카지와라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얼굴빛이 매우 희던 카지와라의 그 얼굴이 한 잔한 사람처럼 갑자기 붉어졌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은 미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은 벌써 많이 이긴 것 같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수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나갔습니다. 하도 흥분해서 수업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을 일본정부는 ‘대소봉대일’로 정하고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며 전의(戰意)를 더욱 가다듬는 날로 삼았을 뿐 아니라 매달 8일에는 전쟁에 쓰일만한 폐품이나 쇠붙이를 집에서 갖고 학교에 와서, 일본군의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보내야만 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풀을 베어다 말려서, 말에게 먹이도록 일본군대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4학년이 되어서는 한 여름을 내내 용강 비행장 닦는 일에 동원되어 거기서 친구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흙을 파서 나르는 토목공사장에서, 코스모스가 피어 가을을 알릴 때까지 날마다 중노동을 했는데 그때 레일 위로 밀고 다니는 ‘도록꼬’(일본사람들의 발음으로)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다 그 ‘도록꼬’가 뒤집혀 그때 입은 왼 손목의 상처가 74년이 지난 오늘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12월 8일이라는 주제의 연속극의 일부였습니다.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무슨 꿈이 있고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우울한 나날이 이어졌을 뿐입니다. 나의 젊은 날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습니다. 2~3년 뒤에는 일본군대에 끌려가 나의 형님처럼 소만국경이나 남양군도 어디에서 ‘일본천왕’을 위한 ‘개죽음’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청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희는 좋겠다”라는 한 마디 뿐입니다. ‘연금개혁’도 하고 ‘노동개혁’도 하고 ‘금융개혁’도 하고 ‘교육개혁’도 할 수 있지요? 더 나아가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 세계 평화를 위한 공원만 만들 것이 아니라 UN본부도 거기에 유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뿐입니까? 남북통일의 큰 꿈도 ‘impossible dream’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큰일들을 위하여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와야 할 때가 온 것 아닙니까!
김동길(www.kimdonggill.com) ‘자유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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